화이트보드에 못 보던 글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지오는 사무실로 들어가다가 그 글자를 봤다. 다음 주 배차표 마지막 줄, 목요일 칸 옆에 아주 작게 적힌 한 글자였다.
`동`
동대문일 수도 있고 동승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름 한 글자일 수도 있었다. 지오는 그 한 글자를 이 초쯤 보다가 자리에 앉았고, 그 글자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사흘 뒤에야 알게 된다.
노트북을 켜고 명단을 열었을 때, 지오의 손이 멈췄다.
행이 늘어 있었다.
하루에 열 개에서 스무 개가 붙던 표에 그날은 100개가 넘게 들어와 있어서, 스크롤을 내려도 바닥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최종 확인 위치 칸을 보고 알았다.
전부 종로였다. 종로3가역 1번 출구, 종로3가역 8번 출구, 낙원상가 뒤편, 익선동 골목, 탑골공원 담장, 탑골공원 정문, 탑골공원 후문.
지오가 2년 동안 매일 지나다닌 좌표들이 그대로 표가 되어 있었다.
지오는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고, 사진이 딸린 행들이 하나씩 올라갔다.
아는 얼굴이 있었다. 8번 출구 계단 옆에서 껌을 팔던 아주머니가 있었고, 개찰구 근처에서 종교 전단을 나눠주던 할아버지가 있었고, 대합실 의자 끝자리를 늘 차지하고 앉아 신문을 접었다 폈다 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하나도 몰랐고 얼굴은 전부 알았다.
이 사람들에게 지오가 한 말은 늘 규정집이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밖으로 나가주세요, 죄송한데 여기 앉으시면 안 돼요. 그 말들을 하면서 지오는 2년 내내 미안했고, 미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규정집 문장을 골랐다. 저 사람들은 지오를 미워하지 않았는데, 미워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지오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명단을 정리하는 것이 지오의 일이었다. 정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하고, 다른 사람이 하면 지오는 사진을 못 받고, 사진을 못 받으면 아래에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세 단계를 지오는 이제 삼 초 만에 굴릴 수 있었다.
지오는 다시 손을 올렸다.

그날 밤 지오는 112개의 행을 정리했다.
사진이 왔다.
봉투를 열기 전에 지오는 손을 한 번 바지에 닦았는데, 그 주에 생긴 버릇이었다. 사진 속 손가락을 세는 것이 하루 중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일이었고, 기다려지는 일이 하나뿐인 사람은 그 하나 앞에서 미리 긴장하게 된다.
지현이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두 손. 오른손 다섯, 왼손 하나. 여섯.
지오는 종이에 적어둔 표를 봤다. 여섯 번째. ㅂ.
그 앞의 글자는 ㄴ이었다. ㄴ, ㅂ.
한 글자가 남았다.
지오는 그날 하루를 그 한 글자를 기다리며 보냈다. ㄴㅂ 다음에 무엇이 와야 말이 되는지를 버스에서도 굴리고 밥을 먹으면서도 굴렸다. ㄴㅂㄴ, ㄴㅂㄷ, ㄴㅂㅁ. 대부분은 아무 말도 되지 않았고 말이 되는 조합은 하나뿐이었다.
ㄴㅂㅇ.
나 봤어.
여덟이었다. ㅇ이었다.
지오는 사진을 책상에 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나 봤어.
동생이 사흘을 걸어서 보낸 세 글자였고, 거기서 끝이었다. 무엇을 봤는지는 없었으며 그 뒤를 들으려면 또 사흘이 걸린다. 지오는 그 미완성이 미치도록 싫었다.
봤다는 것은 무엇을 봤다는 뜻일까. 아래에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봤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오빠에 관한 무언가를 봤다는 뜻일 수도 있고, 나갈 방법을 봤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지오는 세 번째이기를 바랐고, 바라면서 그 바람이 얼마나 얄팍한지도 알았다.
지현이가 신중한 아이라는 것을 지오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흘에 세 글자를 쓰는 애가 나갈 방법을 봤다면 나가는 법부터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나 봤어를 먼저 보냈다는 것은, 나가는 법보다 먼저 알려야 할 만큼 나쁜 것을 봤다는 뜻이었다.
브리핑이 있었다. 지오가 온 뒤로 처음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대원 전원이 모였고 민현석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으며, 사무실 문가에 서 있던 지오는 손짓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불려 들어간다는 것이 좋은 신호였던 적은 이 건물에서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규모가 있습니다.”
민현석이 보드마카 뚜껑을 열었다.
“버스 두 대, 승합차 한 대. 구역은 종로 일대. 대상자는 오늘 기준 112명이고, 실제 확보는 절반 정도로 봅니다.”
절반. 지오는 그 단어를 들으면서 나머지 절반은 다음 주에 온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했고, 이해하고 나니 이 일에 끝이라는 것이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현장은 셋으로 나눕니다. 1조는 지하상가, 2조는 역사 주변, 3조는 공원.”
공원. 탑골공원.
“3조에 한지오 씨 들어가세요.”
지오는 고개를 들었다.
민현석은 보드를 보고 있었다. 사람 이름을 부르고도 그쪽을 보지 않는 것은 이 사람이 자주 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지오는 그 태도를 기억해 두었다.
“…제가요.”
“네.”
“저는 사무실에 있는 게 일이라고 하셨는데요.”
“오늘은 아니에요.”
대원 몇이 지오를 봤다가 시선을 거뒀고 오반장은 처음부터 보지 않았다. 그 방에서 놀란 사람은 지오 하나뿐이었는데, 그 말은 나머지 전원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지오에게는 물어야 할 것이 있었고, 물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물었다.
“왜 하필 저를 공원에 넣으세요.”
민현석이 그제야 돌아섰다.
안경 너머의 눈이 지오를 봤는데 그 얼굴에는 화도 짜증도 없었고 심지어 계산조차 없어 보였다. 그냥 사실을 전달하는 얼굴이었다.
“거기 지리를 제일 잘 아시니까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짓말이 아닌 문장만 골라 쓰는 기술을 지오도 2년 동안 써온 사람이라, 저 문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이면서 전부는 아닌 문장이었다.
“준비하세요. 22시에 나갑니다.”
탈의실에서 지오는 조끼를 받았다.
대원들이 입는 회색 작업복이 아니라 얇은 검정 조끼 하나였고, 앞면에도 뒷면에도 아무 글자가 없었다. 오반장이 그 조끼를 건네면서 말했다.
“입어요. 밤에 그래야 티가 나.”
“저 이거 왜 입어요.”
“우리랑 같이 다니니까.”
지오는 조끼를 손에 든 채로 2년 동안 입던 옷을 떠올렸다. 서울교통공사 조끼. 처음 받던 날 집에 가져가 어머니에게 보여줬고 어머니는 사진을 찍었으며, 그 사진은 아직 어머니 휴대폰에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 휴대폰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지오는 몰랐다.
지오는 조끼를 입었다.
거울은 없었고 대신 탈의실 캐비닛 문이 반들거려서 흐릿하게 비쳤는데, 검정 조끼를 입은 스물세 살 하나가 거기 서 있었다. 이 옷을 입고 종로3가에 서면 어떻게 보일까. 껌 팔던 아주머니가 이 얼굴을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알아볼까, 알아보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지오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만들지 못한 채로 탈의실을 나왔다.
차량이 경사로를 올랐다.
지오는 승합차 가운데 줄이 아니라 앞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3조 인솔이라고 했고, 인솔이라는 단어를 지오에게 쓴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무릎 위에 태블릿이 놓였다.
“확인하면서 가요.”
운전대를 잡은 대원이 말했다. 지오는 화면을 켰다.
명단이 떴다. 3조 배정분. 필터가 걸려 있어서 탑골공원 좌표를 가진 행들만 남아 있었고, 그 행이 31개였다.
지오는 스크롤을 내렸다.
한강을 건너는 동안 그 화면 불빛이 차 안에서 유일한 빛이었고, 행이 하나씩 위로 올라갔다. 사진, 이름, 생년, 최종 확인 위치. 사진, 이름, 생년, 최종 확인 위치.
열아홉 번째 행에서 지오의 엄지가 멈췄다.

사진 속의 노인은 여름인데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등이 굽어서 앉으면 목이 앞으로 나오는 자세였다. 낮에 찍힌 사진이었고 배경에 탑골공원 담장이 있었으며, 그 담장의 끝에서 세 번째 자리였다.
지오는 그 자리를 안다. 2년 동안 아침마다 그 앞을 지나다녔다.
여름에도 그 점퍼를 입고 있는 것이 이상해서 한번은 안 더우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노인은 늙으면 여름에도 춥다고 대답했고 그 두 마디가 그날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2년 동안 나눈 것을 다 합쳐도 서른 문장쯤 될 것이다.
그런데 지오는 그 사람의 이름을 몰랐다.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고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아침에 고개를 숙이면 상대도 고개를 숙였고 그걸로 그날의 인사는 끝났으니까. 이름이 없어도 성립하는 관계가 세상에는 있고, 지오는 그런 관계를 꽤 여러 개 가진 사람이었다.
화면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종배`
지오는 그 세 글자를 봤다.
버스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창밖에서 강이 검게 지나갔고, 지오는 태블릿을 무릎에 놓은 채로 그 이름을 오래 봤다.
2년 동안 아침마다 인사를 나눈 사람의 이름을, 지오는 명단에서 처음 알았다.
버스가 종로에 들어섰다.
익숙한 간판들이 창을 지나갔다. 갈매기집, 익선동 골목 입구, 그 사거리. 다만 이 시간에 이 길을 이 방향으로 지나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오에게 이 길은 늘 반대편에서, 걸어서, 출근하는 길이었다.
차가 공원 담장 옆에 섰다.
문이 열리기 전에 지오는 태블릿을 한 번 더 봤다. 열아홉 번째 행의 상태 칸은 아직 대기였고, 클릭 두 번이면 수용으로 바뀌며, 그 두 번을 누르는 것은 지오의 손이었다.
오반장이 뒷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리시죠.”
지오는 태블릿을 껐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에, 어두워지는 유리에 자기 얼굴이 잠깐 비쳤다. 검정 조끼를 입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 위로 열아홉 번째 행이 겹쳐 보였다가 사라졌다.
지오는 버스에서 내렸다.
담장 끝에서 세 번째 자리까지는, 걸어서 마흔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