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차
Episode 37

불씨

04:28

강인규가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착시라고 생각했다. 도로가 갈라져 있고 조명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렇게 보일 만도 했으니까. 그래서 지오는 기준을 하나 잡았다. 도로 건너편 오피스 빌딩의 층수를 세는 것.

한 번 셌을 때 강인규의 머리는 15층. 세 번째로 셌을 때는 18층.

그사이에 인도에서 넷이 더 일어섰고, 지오는 그 두 가지를 나란히 놓아봤다. 사람이 저것들 쪽으로 넘어갈 때마다 강인규가 조금씩 커진다. 왜 그런지 설명할 문장은 없었지만,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늦으면 저쪽이 커진다.

지금까지 지오가 한 계산은 전부 사람 수였다. 몇 명이 남았고 몇 명이 넘어갔고 몇 분이 걸리는지. 이번에는 항이 하나 더 붙었다. 지오가 시간을 쓸수록 나빠지는 쪽으로만 움직이는 항.

04:33

강인규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전에 강인규가 서 있던 자리는 여기서 한참 위였다. 복지센터가 있던 사거리에서 시작해서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밀려 내려왔고, 그 사이 도로 여섯 블록이 부서졌다. 지오가 끌고 온 것도 있고 저것이 사람 소리를 따라간 것도 있었다.

이제는 강남역 사거리였다. 유리로만 지은 건물들이 둘러선 자리.

그 한 걸음에 지하철 환기구가 무너졌다. 도로 아래가 비어 있었으니 아스팔트가 접시처럼 꺼졌고, 꺼진 자리로 상수도관이 터져 물기둥이 올라왔다.

지오는 그 물기둥 옆에 서서 위를 봤다.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물기둥이 어깨에 떨어졌는데 흘러내리는 물이 회색이었다. 재가 이미 그만큼 앉아 있었다는 뜻.

정확히는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보이는데, 젖히고 나서도 얼굴의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었다. 관자놀이의 눌린 자국은 이제 사람 키만 할 텐데, 그만큼 커져버리면 자국은 더 이상 자국으로 읽히지 않는다.

지오는 건너편 빌딩을 다시 셌다가 그만두었다.

저 건물은 28층이고 강인규는 그 옥상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지오는 그 크기를 사람 단위로 바꿔보려고 했다. 팔 하나가 시내버스보다 길고, 손 하나에 승용차가 두 대는 들어가고, 한 걸음이 지오의 서른 걸음. 그것도 15층이었을 때 이야기이니 지금은 마흔 걸음쯤 될 터였다.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숫자는 세어봐야 쓸 데가 없으니까.

04:36

지오는 두 손을 들었다. 이 밤에 여러 번 한 동작이고 여러 번 먹힌 동작이었다. 검은 것이 나오고, 앞으로 밀리고, 무언가가 손가락 두 개 폭만큼 비껴갔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오기는 나왔다. 손목에서 나와 앞으로 가서 강인규의 정강이에 닿았고, 닿은 자리에서 그냥 흩어졌다. 벽에 던진 모래처럼.

크기가 다르면 같은 힘이 다른 뜻이 된다.

지오는 손을 내리면서 손끝을 봤다. 나오는 것이 아까보다 묽고, 나오는 속도도 느리고, 손끝은 차가웠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좁아진 것이 아까부터인지 지금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고.

이런 몸을 지오는 한 번 겪어봤다. 허리 수술하고 사흘 동안.

지오는 그 자리에 서서 자기가 가진 것을 세어봤다. 가루는 있었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아직 나오기는 했으니까. 도로 이십 미터를 없앨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그러려면 흩뿌린 다음 불을 붙이면 된다는 것까지 알았다.

불이 없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손에서 불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지오는 몇 초를 썼다. 3주 동안 나온 것은 검고 마르지 않고 냄새가 없는 가루뿐. 뜨거운 것은 한 번도.

아까 터진 것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불씨 한 점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런 우연은 두 번 오지 않는다.

04:38

“오빠.”

지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

“오빠.”

“저기 사람들 있는 데로 가라고.”

지현이 지오 옆에 와서 섰다. 그러고는 지오가 보고 있는 쪽을 같이 봤다.

지오는 그때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불이 있어야 돼.”

“…불?”

“이게.”

지오는 손을 들었다. 손등에서 검은 것이 배어 나와 있었다.

“이게 불이랑 만나면 아까처럼 돼. 아까 저기 터진 거.”

지현이 도로 저쪽의 그을린 자리를 봤다.

“근데 나한테 불이 없어.”

말해놓고 지오는 스스로 조금 우스웠다. 세상에서 제일 흔한 것이 불이다. 라이터는 편의점에서 천 원이면 사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다 하나씩 갖고 다니고, 가스레인지는 집집마다 있다. 그런데 지금 지오에게 없었다.

손전등과 열쇠 세 개와 돌 하나. 3주 동안 지오가 가진 것의 전부.

지현이 지오를 봤다.

“오빠.”

“어.”

“얼마나 필요해.”

지오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위험하냐거나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애는 필요한 양을 물었다. 셈이 되는 질문.

“…많이.”

“많이가 얼마인데.”

“저기까지 깔아야 돼.”

지오는 도로 저쪽 끝을 가리켰다.

“저기부터 여기까지 쭉 깔고, 저 사람 발밑까지 이어서, 몸까지 감아야 돼. 그러고 나서 저쪽 끝에 불을 붙이면 이쪽으로 달려와.”

지현이 그 선을 눈으로 따라갔다. 지오가 가리킨 데서 강인규가 선 자리까지 500미터가 넘었다. 그 사이에 넘어진 차량과 갈라진 도로와 끊어진 전선, 그리고 흩어진 사람들.

“불은 저쪽 끝에서 붙여야 돼?”

“멀수록 좋아. 붙는 순간 이쪽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왜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내가 그 사이에 할 게 있어.”

지현은 더 묻지 않았다. 물었으면 뭐라고 대답했을지 지오 자신도 몰랐다. 다만 이 애가 묻지 않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는 것을 지오는 알았다. 알면서 묻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3주 전부터 알고 있었고.

지현이 인도 쪽을 봤다. 통제선 밖에 사람이 있었다. 육교 위, 상가 앞, 지하철 출입구 계단. 대피하라는 방송이 여러 번 나갔는데도 남아 있는 사람들.

그 손에 폰이 들려 있었다.

“오빠.”

“어.”

“저 사람들 다 라이터 있어?”

04:41

지현이 걸어갔고 지오는 그 뒷모습을 봤다. 신발 한 짝이 없는 발로 재가 앉은 도로를 절뚝이며 갔고,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오는 부르지 않았다. 부르면 돌아설 테고, 돌아서면 말리게 된다. 말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지오는 알고 있었다. 이 밤에 사람을 위험한 자리로 보낸 것은 지오가 먼저였으니까.

지현은 육교 계단 아래에서 멈췄다. 거기 사람이 스무 명쯤 서 있었다. 대부분 폰을 들었고 몇은 통화 중이었고, 아무도 지현을 보지 않았다. 다들 도로 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지현이 그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지오는 나중에도 듣지 못했다. 멀어서 들리지 않았고 지현도 나중에 말해주지 않았다. 지오가 본 것은 열아홉 살짜리가 모르는 어른 스무 명 앞에 서서 입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스무 명이 처음에는 폰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

3주 동안 소리를 내면 안 되는 방에서 산 아이였다. 그 방에서 나온 지 두 시간이 되지 않았고.

지현이 손으로 도로를 가리켰다. 가리키고 나서 자기 발밑을 가리켰고, 그다음에 다시 도로 저쪽 끝을 가리켰다. 멀어서 소리는 안 들리는데 손짓은 보였고, 지오는 그 손짓을 읽을 수 있었다.

저기서 여기까지. 그리고 여기에 불.

남매의 방식이었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자리에서 뜻을 옮기는 법을 이 애는 열 살에 배웠고, 지금은 낼 수 있는데도 손이 먼저 나갔다.

스무 명 중 하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지오는 그 사람을 탓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에 도로 한복판에 28층짜리가 서 있고, 열아홉 살짜리가 와서 불을 달라고 한다. 물러서는 쪽이 정상이니까.

지현은 물러선 사람을 붙잡지 않고 옆 사람에게 다시 말했다.

한 사람이 폰을 내리고 주머니를 뒤졌다.

오십 대쯤 되는 남자였다. 점퍼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손에 들고 잠깐 서 있다가, 그 손을 지현에게 보여줬다.

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로 저쪽 끝을 다시 가리켰다. 지금 켜지 말고 저기서 켜라는 뜻이었다.

남자가 그쪽을 봤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04:44

지오는 그 장면을 보고 몸을 돌렸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도로에 저것들이 있었고, 가루를 깔아둔 자리를 저것들이 밟고 지나가면 선이 끊긴다.

여덟이었다.

인도에서 넘어온 것들이었고, 아직 완전히 되지 않아서 걸음이 느렸으며, 그중 하나는 담요를 아직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지오는 통제선 쪽으로 갔다.

방패 줄이 남아 있었다. 아까 지오가 밀어 넘어뜨린 그 줄이었고, 사람들이 다시 서 있었으며, 지오가 다가가자 몇 명이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지오는 멈춰 섰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든 것이었는데, 검은 것이 손등에 앉아 있어서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것들 죽이지 마세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오는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한 시간 전에 저 사람들은 여섯을 쏴서 눕혔다. 화력을 모아 쏘면 눕는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러고 나서 그중 하나가 다시 일어서는 것도 봤고. 지금 저 줄에 지오의 말은 하지 말라는 소리로만 들릴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방패 뒤에서 누가 물었다.

“저게 사람입니까?”

지오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이라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저것들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고, 사람의 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으니까. 아니라고 해도 거짓말이었다. 세 시간 전까지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을 누가 종이에 받아 적고 있었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지오가 말했다.

“근데 죽이면 확실히 아니게 돼요.”

지오는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자기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죽이지 말라고 해놓고 방법을 주지 않으면 그건 부탁이 아니라 떠넘기는 것이다. 저 사람들에게는 총밖에 없고, 총이 안 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지오가 할 일이었다.

04:46

지오는 첫 번째에게 걸어갔다. 담요를 어깨에 걸친 쪽이었다. 지오가 다가가자 고개를 돌리고 팔을 휘둘렀는데, 지오는 몸을 낮춰 그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목을 잡았다.

지오는 손목을 잡은 채로 냈다. 검은 것이 손바닥에서 나와 그 손목을 한 바퀴 감았다. 감고 나서 지오는 그것을 밀었다.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밀었다.

조여졌다.

지오는 그 감각에 스스로 놀랐다. 3주 동안 이 힘으로 한 일은 전부 밀어내는 것,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감아놓고 방향만 안으로 돌리니까 조이는 것이 됐다.

세우는 것과 비슷했다.

지오는 그 생각을 오래 하지 않았다. 지금 그걸 붙잡으면 손이 멈추니까.

한쪽 손목을 채우고 다른 쪽을 채웠다. 두 손목을 붙여서 감고 그 위를 한 번 더 감았다. 발목도 같은 방식으로. 굳는 데 시간이 걸려서 지오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몇 초를 붙잡고 있어야 했고, 그동안 그것이 몸을 뒤틀었다.

마지막이 입이었다.

입은 어려웠다. 이가 날카로워서 물리면 손이 남지 않을 터였다. 지오는 아래턱을 손바닥으로 받쳐 올려 닫고, 그 상태로 턱 아래에서 정수리까지 한 바퀴 감았다. 감고 안으로 밀었다.

턱이 닫히고 소리가 멎었다.

지오는 일어서면서 손을 봤다. 하나를 채우는 데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고, 손바닥이 아까보다 비어 있었다.

여덟이었다.

04:52

여섯 번째부터 묽어졌다. 감기는 감겼는데 조여도 힘이 안 실렸다. 그것이 몸을 한 번 크게 틀자 감아놓은 것이 뜯어졌고, 지오는 다시 감았다. 이번에는 두 겹으로. 그러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일곱 번째에서 지오는 무릎을 짚었고, 여덟 번째를 채우고 나서는 그 자리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소방대원 하나가 물을 가져왔다. 지오는 받아서 마셨다. 마시고 나서 손등을 봤는데 나오던 것이 이제 젖은 자국 정도. 검다기보다 회색에 가까웠다.

“이거요.”

소방대원이 말했다.

“이 사람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지오가 말했다.

“근데 살아는 있어요.”

04:52

지오는 도로 저쪽 끝으로 갔다. 500미터를 뛰는 데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몸으로 뛰면 그 정도. 이 밤에 지오에게 온 것 중에 제일 쓸모 있는 것이 그 다리였다.

끝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강인규가 저 멀리 서 있었다. 500미터 밖에서도 컸다.

지오는 무릎을 굽히고 아스팔트에 손을 댔다. 그리고 냈다.

묽게 나왔다. 여덟을 채우면서 진한 것을 다 썼으니 당연했다. 손바닥 밑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서 지오는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못 민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미는 것이 아니었다. 깔기만 하면 됐다.

지오는 그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폭은 사람 두 걸음쯤, 두께는 종이 몇 장쯤. 얇아도 됐다. 이 줄이 할 일은 무엇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불을 옮기는 것이고, 불은 얇은 데서도 잘 옮겨 가는 법이니까.

묽어서 오히려 넓게 폈다.

한 걸음 옮기고 다시 손을 대고, 또 한 걸음.

05:01

지오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중간에 잊었다. 손을 대고 걸음을 옮기고 다시 손을 대는 것만 남았다.

200미터에서 귀가 울리기 시작했고, 300미터에서 시야가 좁아졌으며, 400미터에서 무릎이 한 번 꺾였고.

그때 옆에서 누가 지오를 잡았다. 소방대원이었다. 아까 수건을 가져온 그 사람. 지오가 일어서는 것을 붙잡아 도와주고는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같이 걸었다.

지오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할 힘이 없었고, 그 사람도 기다리지 않았으니까.

05:05

강인규의 발밑까지 왔다. 가까이서 보니 발 하나가 승용차 두 대만 했다. 발톱은 아스팔트를 파고 들어갔고, 그 주위로 검은 것들이 흘러 고여 있었다.

지오는 그 발 주위를 돌면서 선을 감았다. 한 바퀴 감고 두 바퀴 감았다. 얇았다. 손목을 채울 때처럼 조일 필요가 없어서 얇아도 됐고, 어차피 지금 지오가 낼 수 있는 것도 그 정도가 전부. 강인규는 지오를 보지 않았다. 아까부터 통제선 쪽만 보고 있었고, 목이 계속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있었다.

지오는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비늘 사이에 손을 걸면 잡혔다. 지오는 그렇게 올라가면서 계속 냈다. 정강이에, 무릎 뒤에, 허벅지 바깥에, 허리에. 지나간 자리마다 젖은 자국.

등까지 올라갔을 때 강인규가 몸을 틀었다.

지오는 떨어졌다.

05:07

지오는 아스팔트에 부딪혀 두 번 굴렀다. 일어나려는데 팔이 안 들렸다. 누운 채로 위를 보니 방금 그어놓은 검은 줄이 강인규의 다리를 감고 등으로 이어져 있었다.

충분한지 아닌지 지오는 몰랐다.

더 할 수 있는지는 알았다. 못 했다.

손을 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손바닥이 젖어 있지도 않고, 손목에서도 팔뚝에서도 뒷목에서도 나오는 것이 없었고.

빈 것이었다.

그때 저쪽 끝에서 소리가 났다.

05:08

사람이 많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서 본 것은 500미터 밖 도로 끝에 사람들이 줄지어 선 그림. 육교 위에도, 인도에도, 차도에도. 아까 스무 명이던 것이 지금은 세어볼 수도 없었다.

그 앞에 지현이 서 있었다.

지현이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불이 붙었다.

05:09

아까 제일 먼저 주머니를 뒤졌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오십 대쯤 되는 사람이었고,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려 잠근 채였다. 검은 줄의 끝까지 걸어가서 쭈그리고 앉더니 라이터를 켰다.

한 번에 안 붙었다.

바람이 있었고 손이 떨렸다. 남자는 몸으로 바람을 막고 두 번째로 켰다.

뒤에서 수백 명이 그걸 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라이터를 손에 든 채로 서 있었다.

지현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는데도 다들 꺼내 들고 있었다. 안 붙으면 다음 사람이, 그것도 안 붙으면 그다음 사람이. 줄을 선 것이 아니라 그냥 각자 꺼내 든 것이었고, 그래서 어두운 도로 끝에 작은 불빛이 수백 개 떠 있었다.

켜기만 하고 아무도 던지지 않았다.

두 번째에 붙었다.

지오는 나중에 그 장면을 여러 번 다시 보게 된다. 그날 밤 육교 위에서 찍힌 영상 중에 그 각도가 남아 있었고, 며칠 동안 어디에나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 도로가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하나씩 앞으로 나와 손을 내렸다가 물러난다.

열아홉 살짜리가 그 앞에 서서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지오는 그 영상을 볼 때마다 같은 데서 멈췄다. 저 사람들 중에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저기 저것이 서 있다는 것과, 앞에 선 애가 불을 달라고 했다는 것뿐.

지오는 그 장면을 누워서 봤다.

무섭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불을 켜놓고 팔을 뻗은 채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람, 켜자마자 뒤로 반 발짝 물러난 사람, 옆 사람 소매를 잡고 있는 사람.

무서워하면서 켰다. 지오는 그것이 이 밤에 본 것 중에 제일 이상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불이 달리기 시작했다.

05:10

바닥에 깔린 것은 터지지 않았다. 지오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눌러 깐 것은 그냥 탄다. 빠르게 타면서 빛과 연기를 낼 뿐이고, 그래서 이 줄은 폭탄이 아니라 도화선.

불이 도로를 따라 왔다. 사람이 뛰는 것보다 빨랐다. 500미터를 오는 데 몇 초가 걸리는지 지오는 세지 못했다. 세는 대신 일어섰으니까.

지오는 일어서면서 마지막 계산을 했다.

깔아놓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저것은 15층이 아니라 스물여덟 층을 넘었고, 도화선 하나가 다리를 감고 있다고 해서 쓰러지지 않는다.

터지는 것은 공중에 떠 있는 가루다.

주유소에서 그랬다. 기름이 안개처럼 퍼지고 가루가 그 안에 섞여 떠 있는 상태, 거기에 불이 닿았을 때 도로 이십 미터가 없어졌다.

떠 있어야 한다.

지오는 두 손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밀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지오는 한 번 더 했다.

손목에 힘을 주고 뒷목에 힘을 주고, 3주 동안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그 방식으로 불렀다. 부르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지오는 알고 있었고, 지금은 부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지 않았다.

불이 도로를 반쯤 왔다.

지오는 그것을 보면서, 저 줄이 강인규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등까지 태우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계산했다.

그냥 탄다.

깔린 것은 터지지 않는다. 밝게 타고 연기가 나고 그러고 끝난다. 28층은 그 정도로 넘어가지 않는다.

끝났다고 지오는 생각했다.

그때 뒷목이 뜨거워졌다.

3주 동안 이 감각이 온 것은 세 번이었다. 골목에서 한 번, 주차장에서 한 번, 그리고 두 시간 전 도로에서 한 번.

세 번 다 지오가 부르지 않았을 때였다.

나왔다.

묽은 것이 아니었다. 손목에서 팔뚝에서 어깨 이음새에서 한꺼번에 나왔고, 지오는 그것을 낸 것이 아니라 뽑히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긁혀 나오는 감각이었다.

지오는 그 감각을 나중에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그때 알았다. 이것은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을 마저 꺼내는 것이고, 꺼내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것을.

지오는 두 손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밀었다.

05:10

몸이 떴다.

지오는 몸이 뜰 줄 예상하지 못했다. 밀어낼 것이 없으면 자기가 밀린다는 것을 지오는 아까 경사로에서 우연히 한 번 겪었고, 그때는 넘어지지 않으려다 잠깐 뜬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계속 밀었다.

몸이 위로 갔다. 3층 높이에서 한 번 기우뚱해서 팔의 각도를 바꿔 바로잡았고, 7층에서 다시 기울었는데 이번에는 바로잡는 데 더 걸렸다.

강인규의 허리 높이에서 지오는 멈췄다.

멈춘 것이 아니라 그 높이를 유지하는 데 힘이 다 들어간 것이었다.

계속 밀어야 떠 있었다. 밀기를 멈추면 떨어진다. 그것이 이 힘의 규칙이고, 지오는 지금에서야 그걸 이해했다.

그리고 그 규칙이 자기에게 무슨 뜻인지도 곧 이해했다.

05:11

지오는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래로 밀어 떠 있는 채로 옆으로 냈다. 손목에서, 팔뚝에서, 어깨 이음새에서, 뒷목에서. 뭉치지 않게, 넓게, 공중으로.

강인규의 주위 공기가 검어졌다.

가루가 뜨기 시작했다. 뭉쳐 있으면 안 되고 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오는 몸으로만 알았고, 어떻게 아는지는 몰랐으며, 지금은 그런 것을 물어볼 시간이 아니었다.

불이 발밑까지 왔다.

지오는 그때 알았다.

떠 있으려면 계속 밀어야 하고, 밀고 있으면 그 자리를 뜰 수 없다. 옆으로 가려면 미는 것을 멈춰야 하고, 멈추면 떨어진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이 없었다.

지오는 그 계산을 끝냈다.

그리고 계속 뿌렸다.

더 크게 하려면 더 뿌려야 했다.

지오가 아는 것은 그 한 줄뿐이었다. 저 아래에 200명이 앉아 있고 통제선 밖에 수백 명이 있고 그 사이 어딘가에 지현이 있었다. 여기서 강인규가 안 쓰러지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지오는 오늘 밤 내내 봤다.

그래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두 시간 전에 지오는 지하에서 계산을 했다.

100명과 밖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을 나란히 놓고 밖을 골랐다. 그때 지오가 저울에 올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 그것을 올렸다.

올려놓고 보니 저울이 기울지 않았다.

지오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3주 동안 명단을 정리하면서 사람을 칸에 넣는 일을 했고, 그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했다. 그때 지오가 자기 이름을 어느 칸에 넣을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넣어보니 넣을 칸이 없었다.

대기도 수용도 관찰도 아니었다. 그런 칸을 만든 사람들이 애초에 이런 경우를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몇 초 동안, 지오의 머리에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 지나갔다.

스물한 살이었다.

친구들은 지금 군대에 있거나 학교에 있거나 자고 있을 것이다. 지오는 그 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3년째 못 알아들었다. 학점, 자취방, 소개팅. 그런 단어들이 오가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지오는 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번 달에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가 나가는지.

해보고 싶었던 것이 없지는 않았는데.

바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가 나가기 전 해 여름이었고, 그때 지현이는 아홉 살이었고, 어머니가 김밥을 쌌다. 파도가 무섭다고 지현이가 울어서 지오가 업고 나왔다. 그 뒤로 세 사람이 같이 어디를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없어서.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기록에는 반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지오는 3주 동안 여러 번 생각했고, 생각할 때마다 다른 답을 냈으며, 어느 답도 확인하지 못했다. 명단 어딘가에 목적지가 적혀 있었을 텐데 지오는 그 칸을 열어보지 못했다.

이제 못 연다.

지현이는 혼자 남는다.

열아홉 살이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집에는 아직 그 봉투 상자가 있다. 어머니가 만든 라면 박스. 그 안에 열몇 개가 쌓여 있고 이제 뜯을 사람이 지현이밖에 없다.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지오는 그 질문에서 멈췄다.

없었다. 3주 동안 여러 번 미안했는데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두 시간 전에 유리 너머로 입 모양만 만들었다.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들렸으면 좋았을 텐데.

05:11

불이 닿았다.

터졌다.

강남대로가 하얗게 됐다.

그 빛은 두 시간 전 빛기둥과 달랐다. 그때는 위로 곧게 올라갔고 이번에는 사방으로 퍼졌다. 건물 유리가 강남역에서 신논현까지 한꺼번에 깨졌고, 지하철 환기구에서 검은 것이 솟았으며, 나중에 소방 기록에는 그 시각에 반경 800미터의 유리창이 전부 나갔다고 적힌다.

소리는 그다음에 왔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나중에 저마다 다르게 설명했다. 누구는 천둥이라고 했고 누구는 지하철이 무너지는 소리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소리가 아니라 벽이 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날 아침 서울시에 접수된 신고는 4만 건이 넘었다.

사람들은 엎드렸다. 육교 위에 있던 사람들은 난간을 잡고 주저앉았고, 인도에 앉아 있던 200명은 서로를 덮었으며, 통제선의 방패가 전부 넘어갔다.

지현은 엎드리지 않았다.

05:12

강인규가 넘어갔다.

무릎이 먼저 갔고 그다음에 상체가 갔다. 28층이 넘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넘어가면서 건너편 건물의 아래층을 쓸었고, 도로에 닿았을 때는 지진계에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가 멎었다.

낮은 것이 없어졌다. 발바닥으로 오던 것도, 이가 시리던 것도. 3주 동안 이 도시 아래 어딘가에 깔려 있던 무언가가 그제야 꺼진 것이다.

묶여 있던 것들이 조용해졌다.

부풀어 있던 것들이 아주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만 사람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소리가 멎어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으니까.

05:14

연기가 걷히는 데 2분이 걸렸다.

지현이 먼저 뛰었다.

경찰이 잡았고 지현이 뿌리쳤다. 소방대원 둘이 앞을 막았는데 그 사이로 빠져나갔다. 잔해가 아직 뜨거운데도 그 위로 올라갔다.

“오빠.”

대답이 없었다.

“오빠!”

05:16

사람들이 올라왔다.

소방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경찰이 오고 그다음에 통제선 밖에 있던 사람들이 왔다. 아까 라이터를 던진 사람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잔해 위로 올라와 콘크리트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들것이 두 대 올라왔다.

구급대원들이 잔해 사이를 훑었고, 열화상 장비가 들어왔고, 개가 왔다. 개는 잔해 위를 두 바퀴 돌다가 한 자리에서 멈췄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콘크리트를 들어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개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가 줄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이름을 부르고 지시가 오갔는데, 십 분이 지나자 그런 소리가 하나씩 없어졌다. 남은 것은 콘크리트를 옮기는 소리와 사람들이 숨 쉬는 소리뿐.

아무도 그만두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두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었다.

05:24

육교 위 사람들이 폰을 내렸다.

한 사람이 먼저 내렸고 그다음에 옆 사람이 내렸다. 십 분 전까지 수백 대가 이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이제 그중 어느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찍던 사람들이 찍기를 멈췄다.

그중 한 방송은 그때까지 켜져 있었다.

육교 위에서 새벽 내내 중계하던 계정이었고, 시청자가 그 시각에 십만이 넘었다. 방송하던 사람은 화면을 잔해 쪽에 고정해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채팅창은 계속 올라갔다.

그 채팅창에 한 단어가 반복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지오는 그때 그 단어를 몰랐고, 사흘 뒤에 병실에서 처음 읽는다.

지현이 잔해 위에 앉아 있었다.

울지 않았다. 3주 동안 소리 없이 우는 법을 배웠고 두 시간 전에는 소리를 내서 울었는데, 지금은 둘 다 아니었다. 그냥 앉아서 콘크리트 조각을 하나씩 옆으로 옮길 뿐.

옮기면서 세고 있었다.

구급대원 하나가 지현 옆에 와서 앉았다.

담요를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는데 지현이 밀어냈다. 밀어내고 나서 다시 콘크리트를 옮겼다.

그 사람은 담요를 옆에 놓고 같이 옮기기 시작했다.

지현은 고맙다고 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기다리지 않았다. 이 밤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05:31

누가 무릎을 꿇었다.

지오가 안았던 그 노인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계단을 올라온 100명 중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이 잔해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옆 사람이 따라 꿇었다.

인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섰다.

담요를 두른 채로, 맨발로,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섰고, 잔해 쪽을 봤다.

그 사람들 중에 누구도 지오의 이름을 몰랐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몇 있었다.

종로3가에서 규정집을 읊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흰 승합차 조수석에 앉아 있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담장 앞에서 명단을 들고 서 있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오늘 밤 지오를 여러 번 봤고, 그중 한 번은 문을 열어준 것이었고.

그 사람들도 이름은 몰랐다.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둘뿐이었고, 하나는 잔해 위에 앉아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세 시간 전에 도로에서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렀다.

05:38

동쪽이 밝아지고 있었다.

건물들 위로 밤과 다른 색이 얇게 깔렸다. 헬기가 그 빛을 받으며 선회했고, 사이렌은 아직 났지만 아까와 종류가 달랐다. 사람을 도우러 오는 소리.

회색 재가 아직 내려앉고 있었다.

강남대로 열 차로가 회색이었다. 넘어진 버스에도, 사람들의 어깨에도, 잔해 더미 위에도 회색이 앉았다.

05:41

잔해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콘크리트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지오는 눈을 떴다.

어두웠다.

처음에는 아직 밤인 줄 알았다.

몸 위에 무거운 것이 얹혀 있고 오른팔이 어디 끼었고, 입안에 가루가 가득. 숨을 쉬려다 기침이 났는데, 기침을 하고 나니 갈비뼈 쪽이 아팠다.

살아 있었다.

지오는 그 사실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계산으로는 아니었다. 아까 그 안에 있었고, 나갈 방법이 없었고,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숨이 들어오고 있었다.

왜인지 지오는 몰랐다.

목 뒤가 아주 조금 따뜻했다.

지오는 왼손을 움직여봤다.

움직였다. 손끝이 콘크리트에 닿아서 밀어보려고 힘을 주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가루도 나오지 않았다. 손목에서도 팔뚝에서도 뒷목에서도. 지오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다 쓴 것이었다.

지오는 그 자리에 누운 채로 위쪽을 봤다.

콘크리트 사이로 빛이 한 줄 들어오고 있었다. 조명 빛이 아니었다. 색이 다르고 흔들리지도 않는 빛. 지오는 그 색을 3주 만에 처음 봤다.

아침이었다.

지오는 소리를 내려고 했다.

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에 바람 소리가 났고 세 번째에 소리 비슷한 것이 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위에서 무언가가 치워지는 소리가 났다.

05:43

빛이 들어왔다.

지오는 눈을 감았다가 조금씩 떴다. 콘크리트 판 하나가 들려 나가고 그 자리로 아침이 들어왔다. 그 아침을 등지고 얼굴 하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현이었다.

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봤다. 그러고 나서 지현이 손을 내밀었는데, 지오가 잡으려니 팔이 들리지 않아서 결국 지현이 지오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지현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05:44

밖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인지 지오는 알아듣지 못했고, 알아들을 상태도 아니었다.

지오는 눈을 감았다.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잔해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빛과, 그 빛 안에서 아주 천천히 내려앉는 회색 가루였다.

End of Episode
불씨
다음 화를 기다려주세요
처음으로
© 2026 ZZAN Studio. 무단 전재·복제·배포 금지
1
1
2
1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