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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9

벽

04:31

락스 통이 떨어진 것은 지오가 세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소리가 세 번 났다. 플라스틱이 에폭시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액체가 쏟아지는 소리와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거의 붙어서 났고, 주차장의 콘크리트 천장이 그 소리를 한 번 더 되돌려주는 바람에 실제보다 크게 들렸다.

“어르신!”

대원이 뛰는 소리를 등으로 들으면서도 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돌아보면 안 됐다. 돌아보면 자기도 그쪽으로 가고 싶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넘어지려고 넘어졌다. 그리고 일흔여덟 살의 무릎으로 젖은 바닥에 넘어지는 데에는 값이 든다. 그 값을 노인이 지불하는 동안 지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뒤를 보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지오는 뒤를 보지 않고 문으로 들어갔다.

04:32

문 안쪽은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복도였고, 벽은 도장하지 않은 콘크리트였으며, 천장의 형광등은 세 개에 하나꼴로만 켜져 있었다. 절전이었다. 사람을 가두면서 전기세를 아끼는 곳이라는 것을 지오는 세 걸음 만에 알았고, 그 세 걸음째에 멈춰 서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환풍구가 없었다.

배관은 있었다. 굵은 회색 배관이 벽 위쪽을 따라 지나가고 중간에 격자가 하나 박혀 있기는 했는데, 주차장 것과 모양이 달랐고 크기도 손바닥만 했다. 지오는 그 격자를 이 초쯤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없거나, 없어 보이거나. 어느 쪽인지 지금 확인할 방법은 없었고, 확인할 시간은 더 없었다.

복도는 끝에서 한 번 꺾였고, 지오는 벽에 등을 붙인 채 모퉁이까지 갔다. 붙어서 걷는 것은 배운 적 없는 동작이었는데도 몸이 알아서 그렇게 했다.

모퉁이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키보드 소리였다. 규칙적이고 느린, 무언가를 옮겨 적는 사람의 속도. 지오는 그 자리에서 멈췄고, 멈추고 나니 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자기 귀에만 들리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 소리가 모퉁이 너머로 새어 나갈까 봐 숨을 참았다.

04:34

지오는 모퉁이에서 눈만 내밀었다.

접수대였다. 컴퓨터와 프린터가 놓이고 그 옆에 종이컵이 하나 있고 남색 제복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는, 어느 관공서 민원실에 그대로 옮겨놔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자리였다. 여자는 모니터를 보며 무언가를 입력하는 중이었고 이쪽으로는 등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그 등 너머로 복도가 계속 이어졌다.

지오는 거리를 쟀다. 모퉁이에서 접수대까지 여덟 걸음, 접수대에서 다음 모퉁이까지 열두 걸음. 그 스무 걸음 동안 저 사람이 한 번이라도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면 끝이었다.

벽에 등을 붙이고 계산을 해봤지만 계산할 것이 없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 오늘 밤 지오가 마주친 모든 문제의 공통된 생김새였다.

04:36

지오를 움직이게 한 것은 프린터였다.

오래된 기계라 예열되는 소리부터 요란했고, 여자가 의자를 돌려 급지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등이 완전히 돌아갔다. 지오는 그 순간에 걸었다.

뛰지 않았다. 뛰면 소리가 나고 뛰면 시야 가장자리에 걸린다는 것을, 지오는 2년 동안 승강장에서 배웠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도, 지갑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 사람도, 뛰는 쪽이 먼저 잡혔다. 급한 사람일수록 천천히 걸어야 안 보인다.

여덟 걸음째에 접수대를 지나면서 종이 냄새와 토너 냄새를 맡았다. 아주 평범한 사무실 냄새였고, 그 평범함이 등에 소름을 세웠다. 열두 걸음째에 지오는 다음 모퉁이를 돌았고, 등 뒤에서 프린터가 마지막 장을 뱉고 멈추는 소리가 났다.

04:38

두 번째 복도는 길었고 양쪽으로 손잡이 달린 문이 늘어서 있었으며, 문마다 위쪽에 작은 유리창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지오는 안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 번째 문에서 눈이 저절로 갔다.

이동식 침대였다.

바퀴 달린 침대가 벽에 붙어 세 대 나란히 서 있었다. 3주 동안 문 하나 너머에서 소리로만 듣던 물건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어 있었다.

빈 침대가 왜 무서운지 지오는 처음에 몰랐고, 복도를 반쯤 더 걸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비어 있다는 것은 오늘 쓰고 정리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복도 끝에서 바퀴 소리가 났다.

모퉁이 너머, 아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커지고 있었고 그 밑에 발소리가 둘 깔려 있었다. 지오는 방금 지나온 복도를 돌아봤지만 길고 곧아서, 지금 뛰어도 모퉁이까지 닿기 전에 등을 보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옆에 문이 있었다. 지오는 손잡이를 잡았다.

04:39

손잡이가 돌아갔다.

지오는 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고, 걸쇠가 딸깍 소리를 내지 않도록 손잡이를 끝까지 돌린 채로 아주 천천히 놓았다. 문이 제자리에 앉는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방 안은 어두웠고 바깥의 소리만 선명했다.

바퀴 소리가 문 앞을 지나갔다. 발소리는 둘이었는데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가벼웠으며, 지나가는 동안 말소리가 났지만 단어는 걸러지고 억양만 문을 넘어왔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억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일하다가 하는 말, 그것도 오늘 처음 하는 일이 아닌 사람들의 말이었다.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지오는 참았던 숨을 뱉었고, 뱉고 나서 돌아섰다.

어둠에 눈이 익는 데 몇 초가 걸렸고, 그동안 지오는 냄새로 먼저 방을 읽었다. 좀약과 오래된 종이,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옅은 사람 냄새. 옷장을 반년 만에 여는 집에서 나는 냄새였다.

철제 선반이 벽 세 면을 두르고 있었다. 선반마다 상자가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뚜껑 위에 앉은 먼지가 층마다 두께를 달리했다. 위 칸은 하얗게 덮였고 아래 칸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누군가 여기 자주 드나든다는 뜻이었다.

지오는 제일 가까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옷이었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무릎에 올려놓고 소매를 맞춰 접은 옷들이었다. 남자 셔츠 위에 여자 카디건이 있었고 그 아래 아이 점퍼가 있었으며, 맨 위에는 손목시계 하나와 안경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시계는 아직 가고 있었다. 지오는 그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뚜껑을 닫았다.

다음 상자도 같았고, 그다음도 같았다. 옷이 있고, 옷을 접은 손길이 있고, 그 사람이 아침에 차고 나온 것이 맨 위에 얹혀 있었다.

지오는 세기 시작했다. 세는 것 말고는 이 방을 견딜 방법이 없어서였다.

한 면에 5칸, 한 칸에 8개, 3면이니까 120개. 계산이 끝나자마자 지오는 다시 세어보고 싶어졌는데, 틀렸기를 바라서였지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120명이 이 방에 접혀 있었다.

3주 동안 자기가 정리한 명단이 백 몇십 줄이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무게를 가지고 내려앉았다. 지오는 그 줄들을 엑셀에서 봤다. 이름, 나이, 회수 지점, 상태. 한 줄에 한 사람이 들어가도록 셀의 높이가 맞춰져 있었고, 다 채우고 나면 아래로 스크롤이 생겼다. 그때 지오가 생각한 것은 스크롤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제일 가까운 상자의 뚜껑 모서리에 종이 밴드가 하나 붙어 있었다. 병원에서 채워주는 것과 같은 흰 띠에 바코드와 번호가 찍혀 있었고, 끝이 가위로 잘려 있었다.

풀어준 것이 아니라 잘라낸 것이었다.

지오는 그 잘린 자리를 오래 봤고, 보는 동안 이 방이 무엇인지 알았다. 여기 있는 것은 나간 사람들이 두고 간 옷이 아니었다. 나가지 않을 사람들에게서 벗겨낸 옷이었다.

04:42

지오는 방을 나왔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지오는 다시 벽에 붙어 걸었다. 아까보다 걸음이 빨랐고, 빨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늦췄다.

모퉁이를 돌자 문이 있었다.

넓은 문이었다. 양쪽으로 밀어 여는 것. 유리창이 위에 두 개 있었고 그 너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지오는 유리창에 눈을 댔다.

지오가 살면서 본 것 중에 그만한 실내는 학교 체육관뿐이었는데, 체육관에는 침대가 없다.

이층 침대가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100개는 넘었고 절반쯤이 차 있었으며, 조명을 반만 켜둔 탓에 사람은 사람의 형체로만 보였다. 누운 형체와 앉은 형체가 섞여 있었고 앉은 쪽은 대개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벽에 세면대가 줄지어 붙었고 반대쪽에 식판 반납구가 있어서, 그 두 가지만 떼어놓고 보면 어느 합숙소와도 구별되지 않을 방이었다.

지오는 유리에 눈을 붙인 채로 그 방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저 안에 누운 사람들이 자기가 클릭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부는 아닐 것이다. 지오가 오기 전에도 이 일은 있었고 지오 말고 다른 사람도 명단을 만들었으니 저 방이 전부 자기 것일 리는 없다고, 지오는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생각해보려고 하는 동안에 그 생각이 얼마나 얄팍한지도 알았다. 100명 중에 몇 명이 자기 손을 거쳤는지 세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한 명이어도 같은 일이고, 한 명이었다면 그 한 명의 이름을 지오는 지금 댈 수 있었다.

지오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고 손잡이로 손을 뻗다가, 뻗은 채로 멈췄다.

문 안쪽 천장 구석마다 검은 반구가 붙어 있었다.

04:44

카메라였다.

지오는 유리에 다시 눈을 붙이고 세었다. 네 모서리에 하나씩, 중앙 기둥에 둘. 8대였고, 지오는 그 숫자에서 멈췄다.

동생이라면 출구도 카메라도 진작 다 세어놨을 거라고 이송되던 밤에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 숫자를 세고 있는 것은 자기였다. 남매가 같은 방을 서로 다른 쪽에서 세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되지 않았다.

들어가면 8대에 잡히고, 잡히면 누군가 화면을 보고, 보면 켠다.

문 너머 어딘가에 지현이가 있었다. 100개가 넘는 침대 중 하나, 사진의 왼쪽 위 모서리에 늘 걸리던 그 기둥 근처. 저 문을 밀고 여덟 걸음만 걸으면 닿을지도 몰랐다.

여덟 걸음이었다.

지오는 손을 내렸고, 내리면서 몸의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벽에 손을 짚어야 했다. 여기까지 온 것은 이 문 앞에서 멈추려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 여기까지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멈추는 것뿐이었다.

문틈으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잠든 곳의 냄새, 땀과 잠과 소독약이 섞인 것. 지오는 그 냄새를 알았다. 새벽 세 시의 종로3가 대합실이 꼭 그랬고, 그때 지오는 그 냄새를 맡으며 여기서 자면 안 된다고 사람들을 깨우고 다녔다.

지오는 문에 이마를 댔다. 그리고 그때, 반대쪽 손이 벽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04:45

문 옆의 콘크리트 벽에 지오의 손바닥이 통째로 붙어 있었다. 지오는 그 손을 봤고, 그 손을 보다가 십육 년 전을 봤다.

방이 둘인 집이었고 벽이 얇았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온 밤이면 어머니가 먼저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지만 그런다고 소리가 줄지는 않아서, 고함은 늘 벽을 넘어 작은방까지 왔다. 남매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소리를 내면 안 되니까 벽을 두드리자고 한 것은 지현이었다. 세 살 아래인데 그런 것은 늘 그 애가 먼저 정했다.

한 번은 ㄱ, 두 번은 ㄴ. 모음은 빼고 자음만 보내되, 나머지는 상대가 알아서 붙이기로 했다. 우리끼리는 그걸로 알아들으니까, 라고 지현이는 말했고, 실제로 그랬다.

지오는 주먹을 쥐고 벽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소리는 형편없이 작았다. 콘크리트는 나무처럼 소리를 옮겨주지 않아서 두드린 소리가 손목에서 죽었고, 지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두드렸다.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에게 방법의 효율을 따질 자격은 없었다.

세 번은 ㄷ이었다. 도.

다음은 열 번을 두드려야 했는데 여덟 번째부터 마디가 아팠고 열 번째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ㅊ, 착.

ㄷㅊ. 도착했다.

손을 벽에 댄 채로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안에는 100명이 잠들어 있고 벽은 두껍고 지오가 두드린 것은 고작 손가락 마디였으니, 들릴 리가 없다는 쪽이 상식이었다. 지오는 상식을 무시하고 두 번째로 두드렸고, 세 번째로 두드렸고, 네 번째로 두드렸다.

04:47

다섯 번째를 두드릴 때쯤 손 전체가 저릿했고 마디에서 피가 조금 났는데, 지오는 피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내려다보면 그만둘 이유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여섯 번째를 시작하려는데 벽에서 소리가 왔다.

지오는 멈췄다. 소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콘크리트를 통과하면서 소리는 거의 다 걸러지고 진동만 남아서, 귀가 아니라 손바닥이 그 진동을 받았다.

두 번. 여섯 번. 여덟 번.

지오는 숨을 멈추고 손을 벽에 더 눌러붙인 채로 그 진동을 받아 적었다. ㄴ, ㅂ, ㅇ.

나 봤어.

지오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문틀을 잡아서 버텼다.

그것은 동생이 사진으로 보낸 두 번째 문장이었고, 지금 이 벽으로 굳이 같은 말을 다시 보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 신호를 알아듣는 사람은 세상에 둘밖에 없으니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으니까.

나야. 지현이는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지오는 벽에 이마를 대고 두드렸다. 한 번, 여덟 번, 한 번, 아홉 번.

ㄱ, ㅇ, ㄱ, ㅈ. 같이 가자.

벽이 잠깐 조용하더니 답이 왔다.

두 번, 열 번. ㄴ, ㅊ. 지오가 그 두 글자를 읽기도 전에 다음이 이어졌다. 두 번, 여덟 번. ㄴ, ㅇ.

ㄴㅊ. ㄴㅇ.

지오는 그 자음들을 두 마디로 끊어 읽었다. 남매의 방식이 늘 그랬다. 한쪽이 자음만 던지면 다른 쪽이 살을 붙이는데, 붙이는 데 규칙 같은 것은 없고 그때의 상황이 있을 뿐이었다. 열 살과 일곱 살이 이불 속에서 만든 문법치고는 오래 갔다.

낮춰. 나와.

낮춰, 를 이해하는 데 이 초가 걸렸다.

천장 구석의 검은 반구들이 먼저 떠올랐다. 위에 달린 것은 위에서 아래를 보고, 위에서 아래를 보는 물건에는 반드시 보지 못하는 아래가 있다. 지오가 문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문과 바닥 사이에 손가락 두 개쯤 되는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안쪽 바닥이 한 뼘쯤 보였다.

몸을 낮추면 안 잡힌다는 뜻이 아니었다. 낮게 오라는 뜻이었고, 그 말은 지현이가 이미 이 방을 그런 눈으로 여러 번 훑어봤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와, 가 남았다.

지현이가 나온다는 것인지 지오더러 나가라는 것인지 두 가지로 읽혔고, 두 가지 다 말이 됐다. 지오는 되물으려고 벽을 두드렸다. 한 번, 네 번. ㄱ, ㄹ. 그런데, 라고 시작하려던 것이었다.

세 번째를 두드리려는데 손이 저절로 멈췄다. 복도 저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04:49

지오는 벽에서 손을 뗐다.

발소리는 둘이었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아까 바퀴를 밀고 지나간 그 둘인지 다른 둘인지는 알 수 없었고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복도는 곧았고 방금 나온 창고는 열 걸음쯤 뒤였으며 발소리는 그보다 가까웠다.

문과 벽이 만나는 자리에 짧은 기둥이 튀어나와 있었고 그 뒤에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그늘이 있었다. 지오는 그 안으로 몸을 접어 넣고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이 문 앞에 섰다. 지오와의 거리는 두 걸음이었고, 둘 중 누구든 고개를 사십오 도만 돌리면 보이는 자리였다.

“몇 시야.”

“오십 분.”

“들어가서 깨워야 되나.”

“아직. 오십오 분에.”

지오는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이 문 유리에 얼굴을 대는 소리가 났다. 유리에 코가 눌리는 소리, 그리고 손으로 유리를 문지르는 소리.

“조용하네.”

“조용하지 뭐.”

두 사람이 웃었다. 크게 웃은 것이 아니라 숨으로만 웃는 정도였는데, 지오는 그 웃음을 두 걸음 거리에서 들었다.

“어제 그 할아버지 어떻게 됐대.”

“어느.”

“그 뭐야, 계속 기침하던.”

“아, 그거.”

한 사람이 잠깐 말을 멈췄고, 그 사이에 지오는 그 사람이 담배를 꺼내려다 마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 처리했대.”

“아이고.”

“뭐 어쩌겠어.”

발소리가 멀어졌다.

04:52

지오는 그늘에서 나오지 못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방금 들은 문장 두 개가 머릿속에서 저 혼자 되감겼다. 어제 처리했대. 뭐 어쩌겠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이고, 라고 말한 쪽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비웃음도 무심함도 없이 진짜로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으니까.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기 일 중에 그런 항목이 하나 들어 있을 뿐이었고, 아마 퇴근하면 집에 가서 늦게까지 안 자는 아이를 재울 것이었다.

지오도 3주 동안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오는 아이고, 라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오는 벽으로 돌아갔고, 손을 대고 두드리려는 순간 복도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04시 53분이었다. 청소 인력이 들어가는 것이 오십 분이고 문이 닫히는 것은 그다음이니, 지오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래서 빠르게 두드렸다. 마디가 아프든 말든.

ㄱ. ㅇ. ㄱ. ㅈ. 같이 가자.

벽은 조용했고, 지오는 같은 것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답이 온 것은 두 번째 다음이었다.

한 번.

그것뿐이었다. 지오는 두 번째 두드림을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 손바닥의 땀이 콘크리트에 자국을 남겼고, 두 번째는 오지 않았다.

한 글자짜리 말은 하나뿐이었다.

ㄱ. 가.

가라고 했다. 100명이 누워 있는 방 안에서, 오빠가 문 두 걸음 밖에 서 있는데, 열아홉 살짜리가 가라고 했다.

지오는 반박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멈춘 이유는 하나였고, 동생이 옳아서였다.

지금 저 문을 열면 8대가 본다. 보면 켜고, 켜면 지오는 쓰러지고, 쓰러지면 지현이도 못 나온다. 게다가 오늘 밤 여기까지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 문은 다시는 열려 있지 않을 것이므로, 지오가 문을 미는 순간에 잃는 것은 오늘 하루가 아니라 앞으로의 전부였다.

한 번뿐인 문을 오늘 태우는 셈이었다.

04:55

지오는 마지막으로 두드렸다. 세 번, 일곱 번, 여덟 번, 세 번.

ㄷ. ㅅ. ㅇ. ㄷ. 다시 온다.

약속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우스웠다. 손가락 열세 번으로 하는 약속이라니. 그런데 지오가 여태 살면서 지킨 약속 중에 제일 무거운 것이 지금 벽에 남았다.

벽에서 답이 왔다. 한 번, 세 번, 네 번, 한 번.

ㄱ. ㄷ. ㄹ. ㄱ. 기다릴게.

지오는 손을 벽에서 뗐고, 떼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손바닥이 콘크리트에 붙어버린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땀 때문이었다.

창고를 지나고 두 번째 복도를 지나 접수대 앞에 이르러서 지오는 멈췄다. 여자는 여전히 앉아 있었고,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이쪽을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는데 지오는 기다렸다.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언제나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04:57

여자가 일어선 것은 컵을 들고서였고, 정수기는 접수대에서 왼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그 여자가 걸어가는 동안 등은 완전히 이쪽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지오는 그 등을 보면서 걸었다.

여덟 걸음을 지나 열두 걸음을 지나는 동안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게 하느라 종아리가 떨렸고, 첫 번째 복도로 들어서고 나서야 뒤에서 물 나오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오는 자기가 여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04:58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다만 그 앞에 대원이 서 있었고 그 너머 주차장에서는 사람들이 양동이를 챙기는 중이었는데, 나종배가 그중에 섞여 있었다. 바지 무릎이 검게 젖어 있었고 걸을 때마다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지오는 복도 끝에 서서 그 광경을 봤다.

지금 나가면 대원이 본다. 대원이 보면 오늘 밤의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고, 벽 너머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것도 없던 일이 되고, 노인이 젖은 바닥에 무릎을 찧은 것까지 전부 없던 일이 된다.

그러니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노인이 양동이를 들다가 놓친 것은 그때였다.

이번에는 소리가 작았고, 양동이가 기울면서 물이 조금 쏟아졌을 뿐이었지만, 양동이를 주우려던 노인이 중심을 잃고 무릎을 짚는 바람에 대원이 다시 그쪽으로 뛰었다.

“어르신, 아 진짜.”

대원의 등이 돌아간 그 몇 초 사이에 지오는 문턱을 넘었고, 노인이 일부러 두 번째로 넘어져 준 덕분에 아무도 그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04:59

주차장은 밝았고, 지오는 그 밝은 데를 가로질러 사무실 쪽으로 걸었다. 뛰고 싶었지만 뛰지 않았다. 뛰면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면 사람이 돌아보고, 돌아보면 여기까지 온 것이 전부 무너진다는 것을 2년 동안의 지하가 가르쳐 놓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지오는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책상에 손을 짚었고, 짚고 나서야 다리에서 힘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을 들어 보니 마디 세 개가 까져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손바닥에는 콘크리트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는데, 지오는 가루를 털어내지 않고 그냥 오래 봤다.

05:00

봉투가 온 것은 오 분 뒤였다.

민현석이 책상 위에 놓고 나갔고 문이 닫혔으며, 지오는 손에 묻은 것을 닦지도 않고 봉투를 뜯었다.

사진 속에서 지현이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담요를 덮고 등을 돌린 사람 옆에 앉아 있었다.

지오의 눈이 간 곳은 동생의 손이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는데 왼손은 주먹이고 오른손만 펴져 있었으며, 편 것은 손가락 하나였다.

하나. 지오는 종이에 적어둔 표를 폈다. 첫 번째 자리. ㄱ.

ㄱ 하나였고 앞뒤로 아무것도 없었다. 문장의 첫 글자만 보낸 것이었다.

지오는 그 한 글자를 오래 봤다. 그리고 삼십 분 전에 벽에서 온 마지막 답을 떠올렸다. ㄱㄷㄹㄱ. 기다릴게.

같은 말을 두 번 보내고 있었다. 벽으로 한 번, 사진으로 한 번. 오빠가 둘 중 하나는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애처럼.

지오는 사진을 쥐었다.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모서리가 접혔는데, 이번에는 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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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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