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규가 먼저 움직였다. 팔이 내려오는 것을 지오는 봤다. 보면서 그 팔이 닿기 전에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이미 열 걸음 옆에 가 있었다.
아스팔트가 지오가 서 있던 자리에서 접시처럼 꺼졌다. 파편이 등 뒤로 지나갔고 바람이 한 박자 늦게 왔으며, 지오는 자기가 방금 한 동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오는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뛰었는데 소리가 없었고, 착지했는데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두 시간 동안 지오의 몸은 계속 무언가를 잃기만 했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숨이 끝까지 들어왔고, 허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수술한 뒤로 처음이었다.
두 번째 팔이 왔다. 지오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나서기로 했으니 올 것이었고, 왔다. 손바닥 앞에서 검은 것이 터져 나가 내려오는 팔에 닿았으며, 닿는 순간 팔꿈치까지 울리는 반동이 지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팔이 비껴갔다.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밀리기는 했는데 손가락 두 개 폭만큼이었고, 그 폭 덕분에 팔은 지오가 아니라 지오 옆의 도로를 쳤다. 강인규를 상대로 지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방향을 손가락 두 개만큼 트는 것. 지오는 뒤로 물러나면서 그 산수를 했다. 이 힘은 세졌고 이제 부르면 오는 것에 가까워졌는데, 강인규는 그보다 훨씬 더 세졌다. 간격은 좁혀진 것이 아니라 벌어져 있었다.
강인규가 지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돌린 방향에 불빛이 있었다. 통제선이 물러난 자리에 경찰 버스들이 있었고 그 뒤로 사람들이 아직 다 빠져나가지 못한 채 몰려 있었으며, 수백 명이 동시에 내는 소리가 그쪽에서 넓게 올라오고 있었다.
지오 하나가 내는 소리보다 그쪽이 컸다. 강인규가 한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발이 닿은 자리의 가로등이 넘어갔고 사람들의 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었으며, 비명은 아까보다 더 컸으므로 걸음이 더 빨라졌다.
소리가 강인규를 부르고, 강인규가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가 강인규를 다시 부른다. 지오는 그 순환을 알아봤고, 알아본 순간 자기가 끊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도 알았다.
더 큰 소리를 내면 된다. 목으로는 안 됐다. 지오는 주위를 봤고, 옆으로 넘어져 있는 경찰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지오는 버스의 밑바닥에 두 손을 대고 밀었다. 이번에는 검은 것이 손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12톤이 아스팔트를 긁으면서 미끄러져 나갔고, 그 소리는 쇠가 도로를 파는 소리라서 이 밤에 난 어떤 소리와도 달랐다.
버스가 강인규의 발목 옆에서 멈췄다. 강인규가 돌아봤다. 15층 위의 얼굴이 지오를 내려다봤고, 지오는 그 얼굴을 마주 봤다. 관자놀이의 눌린 자국이 조명에 드러났다가 그늘로 들어갔다.
“여기요.”
지오가 말했다.
이 밤에 세 번째로 하는 말이었다. 한 번은 지하에서 여섯에게 했고 한 번은 조금 전에 강인규에게 했으며, 세 번 다 뜻은 같았다. 사람들 말고 나를 보라는 뜻이었다.
강인규가 왔다. 지오는 빈 도로 쪽으로 뛰었다. 뛰면서 등 뒤로 발소리를 셌는데 셈이 되지 않았다. 한 발짝이 지오의 서른 걸음이었고, 두 발짝째에 그림자가 지오를 덮었으며, 지오는 옆으로 꺾으면서 세 번째 팔을 손바닥으로 받아 비껴냈다.
받을 때마다 팔 전체가 울렸다. 슈트가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지오는 몸으로 알았다. 이 반동을 맨몸으로 받았으면 첫 번째에 끝났을 것이었다. 다만 슈트가 받아주는 것은 반동까지였고, 저 크기 자체는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은 아까와 같았다. 달라진 것은 하나. 아까는 버티는 것도 못 했는데 지금은 버틸 수 있었고, 버티는 동안 사람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지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팔을 받았다.
네 번째를 받아낸 뒤에 지오는 무릎을 짚었다. 손끝이 저렸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좁아져 있었고, 사이렌 소리가 한 겹 뒤로 물러나 있었다. 지오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몸이 무거워지는 방향이 익숙했고, 어디서 익숙한지를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수술하고 나서 사흘 동안 그랬다. 지오는 자기 손등을 봤다. 슈트의 이음새에서 검은 것이 아직 새어 나오고 있었고, 새어 나온 자리가 마르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을 오래 볼 시간이 없었다.
그때 강인규가 멈췄다. 팔을 내리고 상체를 세웠다. 지오는 그 정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뒤로 물러났다. 저 몸집이 멈춘다는 것은 다음 것을 준비한다는 뜻이었다.
강인규가 입을 벌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귀로 들리지 않았다. 지오가 먼저 느낀 것은 발바닥이었고, 그다음이 정강이였고, 그다음이 이였다.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그 진동은 낮고 넓고 끝이 없었다.
지오는 그 감각을 알았다. 3주 동안 사무실 책상 위 종이컵의 수면에 그 파문이 있었다. 새벽에 하역을 하다가 발바닥으로 올라오던 것이 그것이었다. 두 시간 전 지하 3층에서 온몸으로 받은 것도 그것이었다.
콘솔은 부서졌을 것이었다. 건물이 통째로 뜯겨 나갔으니까.
그런데 소리는 살아 있었다.
지오는 위를 봤다. 강인규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목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부풀었고, 그 리듬이 발바닥으로 오는 것의 리듬과 같았다.
이 소리를 내는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강인규였다.

지오는 그 자리에 서서 몇 가지를 동시에 알았다. 끄는 스위치가 없었다. 뽑을 배선도 없고 벽에서 떼어낼 함도 없었다. 소리를 멈추는 방법은 강인규를 멈추는 것 하나뿐이었고, 강인규를 멈추는 방법을 지오는 아직 몰랐다.
그리고 이 소리가 켜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았다.
지오는 그것을 오늘 밤에 배웠다.
도로 저쪽에서 먼저 일이 났다. 건물 잔해 옆에 저것들 셋이 쓰러져 있었다. 군이 쏴서 눕힌 것들이었고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의 등이 부풀기 시작했다.
지오는 그 등을 봤다. 어깨가 넓어지고 등이 두꺼워졌다. 이미 사람의 골격을 넘어서 있던 몸에 부피가 더 얹혔고, 얹히면서 벗겨져 있던 피부 조각이 뜯어져 나갔다. 새 표피 위로 비늘이 겹쳐 돋는 것이 조명 아래에서 보였다.
쓰러져 있던 것이 일어섰다. 군 쪽에서 다시 총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튕겨 나가는 소리가 아까와 달랐다. 더 둔했고 더 멀리 튀었다.

지오는 인도 쪽을 봤다. 구조된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줄지어 앉아 있었고, 구급대원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이름을 묻고 있었으며, 몇은 서로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3주 동안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오가 명단에 올려서 실어 온 사람들이었고, 두 시간 전에 문을 열어 꺼낸 사람들이었고, 지현이 계단에서 100까지 센 사람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일어섰다.
담요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노인이었다. 조금 전까지 접이식 의자에 앉아 종이컵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고, 옆에 구급대원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지오는 그 장면을 조금 전에 지나가면서 봤다. 이름을 묻고 받아 적는 중이었고, 그것이 이 밤에 지오가 본 것 중에 제일 정상적인 광경이었다.
그 사람이 종이컵을 놓지 않은 채 일어섰다.
구급대원이 따라 일어나며 팔을 잡으려고 했다. 부축하려는 손이었고 하루에 수십 번 하는 동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지오는 그 뒤의 몇 초를 나중에도 순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종이컵이 아스팔트에 떨어져 물이 번지던 것과, 그 사람의 목 뒤가 부풀어 오르던 것과, 담요 아래에서 회색 조각이 벗겨져 내리던 것이었다. 비명은 그다음에 났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밀리듯이 뒤로 물러났고 줄이 무너졌으며, 담요가 여기저기 떨어진 자리에 맨발들이 남았다.
그 사람은 조금 전까지 이름이 있었다. 구급대원이 그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으니 종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지오는 그 종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생각했고, 그것을 생각하는 자기가 이상했지만 멈추지 못했다.
명단의 칸이 여섯 개였다. 대기, 수용, 관찰, 반출, 폐기, 말소. 지오는 그 여섯 단어를 3주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봤고, 자기 손으로는 대기에서 수용까지만 옮겼다.
관찰이라는 칸이 왜 있는지 지오는 몰랐다. 지금 알았다. 저 사람들은 안에 있는 동안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니까 지켜보는 것이고, 그러니까 지켜본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이었다.

지오는 뛰었다. 인도까지는 백 걸음이 넘었다. 지오는 그것을 세면서 뛰었고, 세면서 자기가 늦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에 강인규가 있었고, 강인규는 지오가 지나가게 두지 않았다.
팔이 옆에서 왔다. 지오는 이번에는 비껴낼 각도를 못 잡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정면으로 받았고, 받는 순간 검은 것이 손바닥 앞에서 두껍게 섰으며, 그다음에 지오는 날아갔다.
버스 옆면에 부딪혔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두 번째로 부딪히는 버스였고 자리도 거의 같았다. 이번에는 소리가 몸 안에서 나지 않았다. 슈트가 충격을 먹었고, 대신 다른 것이 왔다.
멈췄다. 팔이 안 움직였다. 다리도 안 움직였다. 눈은 떠져 있었고 소리는 다 들렸으며, 인도 쪽에서 나는 비명도 들렸다.
지오는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다섯에서 지오는 일어섰다.
두 시간 전 경사로에서는 여섯이었다. 지오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릴 상황이 아니었고, 알아차렸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을 것이었다.
지오가 아는 것은 하나였다. 굳어 있던 다섯 동안 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
둘이 더 서 있었다. 지오는 그 수를 백 걸음 밖에서 셌다. 처음에 하나였고 지금은 셋이었으며, 그 셋 사이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구급차 문이 열린 채였고 들것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지오는 계산했다. 인도로 가서 저 셋을 막으면 강인규가 도로 반대편으로 간다. 여기 붙잡고 있으면 저 셋을 아무도 못 막는다. 그리고 셋은 셋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소리가 계속 나고 있었으니까.
두 시간 전 지하에서 한 것과 같은 모양의 계산. 그때는 답이 있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준다는 답이었고, 지오는 그 답을 알고 골랐다.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지오는 저것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 문장은 계산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저것들은 지오가 명단에 올려 실어 온 사람들이고, 두 시간 전에 문을 열어 꺼낸 사람들이고, 방금 이름으로 불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지오가 저것들을 죽이면 오늘 밤에 지오가 한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된다.
막아야 하는데 죽일 수는 없다. 지오는 그 두 조건을 나란히 놓고 답을 찾으려고 했고, 찾지 못한 채로 다시 뛰었다.
지오는 넷을 인도에서 떼어냈다. 떼어낸 방식은 자랑할 것이 못 됐다. 소리를 냈고, 손에 잡히는 것을 던졌고, 저것들이 자기 쪽으로 오게 만들었다. 3주 동안 배운 그 방법을 계속 반복했다. 지오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었다.
넷이 도로로 나왔다. 지오는 그 넷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고 갔고, 끌고 가는 동안 인도에서 다섯 번째가 일어섰다.
숫자가 지오보다 빨랐다. 지오는 그 사실을 뛰면서 인정했다. 하나를 떼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하나가 새로 생기는 시간이 짧았다. 이 셈은 끝이 정해져 있었고, 끝은 지오 쪽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지오는 뛰다가 멈춰 서서 위를 봤다. 강인규의 목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있었다.
지오는 방향을 바꿨다. 인도를 등지고 강인규 쪽으로 갔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돌아보지 않기로 했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 이 밤에 지오가 한 일 중에 제일 어려웠다.
강인규가 지오를 봤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15층이 숙이니까 얼굴이 3층 높이까지 내려왔고, 벌어진 입 안이 보였다.
지오는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봤다.
혀가 아니었다. 여러 개였다. 접혀 있던 것이 풀리듯이 나왔고, 굵기가 팔뚝만 했으며, 끝이 가늘고 젖어 있었다. 그것들이 입 밖으로 뻗어 나오면서 공기를 훑었고, 훑는 방식이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지오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 물건인지 몰랐다. 저것들의 입은 지오도 여러 번 봤다. 부푼 입술과 그 안의 작고 날카로운 것들. 그런데 그런 촉수가 들어 있는 개체는 하나도 없었다.
3주 동안 지오가 본 개체는 열두 명이었고, 오늘 밤에 본 것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다. 그 어느 입에도 저런 것은 없었다.
저것은 강인규에게만 있었다. 같은 약을 맞았는데 왜 이 사람만 다른지 지오는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저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하나밖에 없고, 그 사람은 지금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 반 박자 늦었다.
지오 쪽으로 온 것은 하나였다. 나머지는 지나갔다. 지오의 옆을 지나 뒤로 갔고, 지오는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 몸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
비명이 짧게 났다가 끊겼다. 지오가 돌아봤을 때 촉수 하나가 사람 하나를 감고 있었다. 구급대원이었다. 조금 전에 종이컵을 든 노인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그 사람이었고, 아직 무릎을 다 펴지도 못한 자세였다.
끝이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지오는 뛰었다. 닿기 전에 가려고 했고, 못 갔다. 열 걸음이 남았을 때 촉수가 빠졌고, 사람이 아스팔트에 떨어졌으며, 지오가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눈을 뜨고 있었다.
목덜미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피가 나지 않았다.

“저기요.”
지오가 말했다.
“저기요. 들려요?”
들렸다. 그 사람은 지오를 봤고 입을 움직였으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못 했다. 손이 지오의 팔을 잡았다가 미끄러져 놓쳤고, 그 손에 아직 볼펜이 쥐여 있었다.
그리고 목 뒤가 부풀기 시작했다.
지오는 그 사람을 안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다른 사람을 안았던 것과 같은 자세였다. 그때는 시간이 조금 있었고 마지막 말도 들었는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사람이 몇 초 전까지 하고 있던 일은 남의 이름을 받아 적는 것이었고, 지오는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며, 이제 물어볼 데도 없었다.
가슴에 신분증이 달려 있었다.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었다.
지오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읽으면 외우게 되고, 외우면 이 사람이 지오에게 한 사람이 된다. 오늘 밤 지오는 그 일을 여러 번 했고, 할 때마다 한 번씩 무너졌다. 지금은 무너질 수 없었다.
지오는 그 사람을 아스팔트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안에 있던 사람만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진 사람은 명단에 없었다. 지하에 내려간 적도 없고 서류 어디에도 올라가 있지 않았으며, 오늘 밤에 여기 와서 남의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강인규가 손을 대니까 그렇게 됐다.
그러면 이 밤에 끝이 있느냐고 지오는 자기에게 물었다. 인도에 200명이 앉아 있고 통제선 밖에 수백 명이 있고 육교 위에 또 수백 명이 있었다.
끝이 없었다.
지오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무서웠다. 두 시간 동안 여러 번 무서웠는데 종류가 달랐다. 아까까지는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서웠고 지금은 자기가 못 막는 것이 무서웠다.
그리고 못 막는다는 것은 조금 전에 확인이 끝난 일이었다.
강인규가 팔을 뒤로 뻗었다. 무언가를 잡는 동작이었다. 지오는 그 방향을 봤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는 데 잠깐 걸렸다.
주유소였다. 요즘 지어진 것이라 주유소라기보다 넓고 낮은 지붕 하나에 가까웠다. 셀프 주유기 넉 대와 급속충전기가 그 아래 서 있었고, 기둥에는 아이들 좋아하는 캐릭터가 크게 그려져 있었으며,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지붕 조명만 대낮처럼 켜져 있었다.
그 옆에 탱크로리가 한 대 서 있었다. 이런 데는 기름을 새벽에 받는다. 지오는 종로3가에서 야간 근무를 하면서 그런 차가 새벽 두 시 세 시에 움직이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오늘 밤 이 차는 들어와서 호스를 내리다 말았을 것이고, 그 뒤로 아무도 이 차를 빼러 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강인규가 그 차를 잡았다.
지오는 뛰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고, 알았기 때문에 뛰었으며, 뛰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저 차가 사람 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만 알았다.
차가 들렸다. 25톤이 지상 12층 높이까지 올라갔다. 은색 탱크 옆면이 주유소 조명을 받아 한 번 번쩍였고, 내리다 만 호스가 아래로 늘어져 흔들렸으며, 밸브에서 새어 나온 기름이 길게 떨어졌다.
그리고 지오 쪽으로 날아왔다.
지오는 두 손을 들었다. 사람 쪽이 아니라 지오 쪽이었으므로 받으면 됐다. 지오는 그렇게 계산했고, 계산할 시간이 반 초쯤 있었고, 그 반 초 동안 검은 것을 최대한 냈다.
이 밤에 낸 것 중에 제일 많았다. 손목에서, 팔뚝에서, 어깨 이음새에서, 뒷목에서 한꺼번에 나왔다. 검은 것이 지오의 앞에서 두껍게 서면서 동시에 옆으로 넓게 퍼졌다. 25톤을 한 점으로 받으면 뚫리니까 넓어야 했다.
탱크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닿는 순간 탱크가 찢어졌다. 25톤이 정면으로 눌렸으니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탱크 안에 들어 있던 기름이 한꺼번에 밖으로 나왔고, 부딪힌 힘 때문에 그 기름이 물처럼 흐르지 않고 안개처럼 흩어졌으며, 지오가 앞에 세워둔 검은 것과 그 안개가 섞였다.
지오는 그 순간을 봤다. 기름이 안개처럼 퍼지고 검은 가루가 그 안에서 함께 떠 있었다. 조명이 그 구름을 통과하지 못하고 안에서 흩어졌으며, 아주 잠깐 지오의 앞에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벽이 서 있었다.
그리고 불이 왔다.

어디서 왔는지 지오는 보지 못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넘어진 경찰차에서 났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탱크가 아스팔트를 긁으면서 튄 불꽃이라고 했으며,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 밤의 강남대로에는 불이 될 만한 것이 너무 많았다.
한 점이면 됐다.
터졌다.
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리보다 먼저 왔기 때문에. 앞이 하얗게 됐고 몸이 뒤로 갔으며, 지오는 자기가 얼마나 갔는지 몰랐다. 나중에 지현이 말하기를 도로 두 개 폭을 날아갔다고 했다.
건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그다음에 왔다. 강남대로 양쪽의 유리라는 유리가 한꺼번에 깨졌고, 그 파편이 십 초 넘게 떨어졌다. 인도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렸다. 강인규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발을 옮겨 버텼다.
지오는 아스팔트에 누워 있었다. 슈트의 앞면이 회색으로 덮여 있었다. 손을 들어보니 손등에서 재가 떨어졌고, 떨어진 자리에 검은 것이 다시 배어 나왔다. 귀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오는 일어나 앉아서 앞을 봤다. 도로 이십 미터가 검게 그을려 있었고 그 위로 불이 낮게 깔려 있었으며, 탱크로리는 없었다. 형체가 없어졌다.
지오는 자기 손을 봤다.
두 손이었다. 3주 동안 이 손에서 나온 것을 지오는 여러 번 봤다. 종로3가 골목에서 봤고, 창고 문 앞에서 봤고, 경사로에서 봤고, 한 시간 전에는 이 손으로 탄을 막았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계측기를 들고 받아 간 것도 이것이었다.
그때마다 지오가 생각한 것은 하나였다.
미는 것. 밀어내는 것. 벽처럼 세우는 것. 그것이 이 힘이라고 지오는 생각했고, 3주 동안 그렇게만 썼다.
지오는 방금 본 것을 다시 봤다. 기름이 퍼졌고 가루가 그 안에 섞여 떠 있었고 불이 한 점 왔다. 그리고 도로 이십 미터가 없어졌다.
기름만으로 저렇게 되지 않는다. 지오는 그 정도는 알았다. 3주 동안 주유소 옆을 하루에 몇 번씩 지나다녔고, 기름에 불이 붙으면 불이 난다. 불이 나는 것과 도로 이십 미터가 없어지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러니까 기름 말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것은 하나뿐이었다. 지오의 손에서 나온 검은 가루.
지오는 손바닥을 폈다. 검은 것이 손금을 따라 고여 있었다. 마르지 않았고 냄새가 없었고, 3주 동안 지오가 여러 번 만져본 그 감촉이었다. 지오는 손가락으로 문질러봤다.
번졌다. 두 시간 전 창고 문 앞에서도 이렇게 번졌다. 그때 지오는 재 같기도 하고 젖은 흑연 같기도 하다고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때는 이 가루의 정체가 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중요했다.
지오는 손을 도로에 문질렀다. 문지르면서 자기가 3주 동안 어디를 지나다녔는지를 생각했다. 종로3가역 대합실. 승합차 조수석. 지하 1층 복도. 유류품 창고. 수용동. 경사로. 그리고 오늘 밤의 강남대로.
그 자리마다 이 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지오는 한 번도 닦은 적이 없고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에는 사람이 있었다. 100명이 한 줄로 걸어 나온 복도에도 떨어져 있었고, 지현을 안고 있던 자리에도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불이 하나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를 지오는 생각하다가 멈췄다.
이걸 들고 다녔다. 지오는 그 문장을 속으로 만들고 나서 손을 도로에서 뗐다. 그리고 자기 두 손을 조금 벌린 채로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무서웠다. 강인규가 무서운 것과 종류가 달랐다. 강인규는 밖에 있고 이 가루는 안에 있었다.
3주 동안 지오는 이 가루가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전에는 이 힘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 다 틀렸다.
가루는 지오의 것이었다. 지켜준 적도 있지만 지켜주라고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가 더 걸렸다. 오늘 밤 손끝이 차가워진 것도, 시야가 좁아진 것도, 소리가 멀어진 것도 전부 이 가루를 많이 낸 뒤에 왔다. 지오는 그 두 가지를 그제야 나란히 놓아봤다.
쓰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인도 쪽에서 소리가 났다. 지오는 고개를 들었다. 폭발이 인도까지 가지는 않았고 사람들은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는 중이었으며, 그 사이에 서 있는 것들이 아까보다 늘어 있었다.
여섯이었다. 지오는 그 수를 세고 나서 위를 봤다. 강인규의 목이 아직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있었다.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지오는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지오는 계산을 하나 시작했다. 3주 동안 하던 일이 계산이었다. 이름을 놓고 나이를 놓고 상태를 놓고, 어느 칸에 넣을지 정하는 일. 지오는 그 일을 잘했는데, 지금 하려는 계산은 그것보다 훨씬 간단했다.
강인규를 멈추려면 그만큼 큰 것이 필요하다.
그만큼 큰 것을 지오는 방금 봤다. 도로 이십 미터를 없앤 그것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오에게는 불이 없었다. 방금 터진 것은 우연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불씨 한 점이 마침 그 자리에 왔을 뿐이고, 그런 우연은 두 번 오지 않는다. 가루는 지오가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불은 하나도 만들 수 없었다.
지오는 강남대로를 봤다. 도로 위에 불이 낮게 깔려 있었다. 넘어진 차량 몇 대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고, 통제선 밖 인도와 육교 위에 사람들이 아직 서 있었다. 수백 명이었다.
그 손에 폰이 들려 있었다.
지오는 그 손들을 오래 보지 않았다. 볼 시간이 없었다. 강인규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고, 여섯이 인도에서 도로로 내려오고 있었으며, 지오의 손끝은 아까보다 더 차가웠다.
지오는 앞으로 걸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다. 두 가지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고, 그 거리를 재는 데 쓸 시간은 더 없었다.
걸으면서 지오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인도 끝에 지현이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혼자 서서, 지오가 아니라 도로 저쪽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지 지오는 알 수 없었고, 저 애가 무엇을 볼 때 저런 얼굴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세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