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차
Episode 27

믿지 마

다음 날, 05:00

두 번째 글자가 왔다.

지오는 봉투를 열기 전에 손을 바지에 닦았는데, 그 동작은 이제 의식하지 않고도 나왔다. 사진을 만지기 전에 손을 닦는 사람이 되는 데에 3주가 걸린 셈이었다.

사진 속에서 지현이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담요를 어깨까지 덮고 등을 조금 돌리고 있었다. 어제와 같았고 그저께와도 같았다.

지오는 동생의 손을 봤다. 오른손 다섯에 왼손 넷, 합쳐서 아홉. 아홉 번째 자음이니 ㅈ이었다.

ㅁ, ㅈ. 한 글자가 남았다.

지오는 사무실에 앉아 그 두 글자를 오래 봤다.

ㅁㅈ 다음에 무엇이 오면 말이 되는지 굴려보는 것은 지난번에 해본 일이었다. 그때는 ㄴㅂ 다음에 ㅇ이 와서 나 봤어가 됐다. ㅁㅈㄱ, ㅁㅈㄴ, ㅁㅈㄷ 하고 순서대로 짚어 나가는 동안 말이 되는 조합은 몇 개 나오지도 않았고, 그중 하나에서 지오의 머리가 멈췄다.

ㅁㅈㅁ. 믿지 마.

아직 세 번째 글자는 오지 않았으니 다른 조합일 수도 있다고, 지오는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도 알았다.

문제는 무엇을 믿지 말라는 것이냐였는데, 이 건물에서 지오가 믿고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06:20

퇴근 버스에서 지오는 주머니에 접어 넣어 온 사진 세 장을 꺼냈다.

첫차 시간의 버스는 비어 있었고 아침 빛이 창으로 길게 들어와서, 무릎 위에 나란히 놓으니 사무실 형광등 아래에서보다 잘 보였다. 어제 것, 그저께 것, 그 전날 것.

세 장 다 어머니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담요를 어깨까지 덮고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얼굴은 벽 쪽을 향해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뒤통수와 어깨선뿐이었다.

지오는 이제까지 그 자세를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원래 등을 돌리고 자는 사람이고 지하는 추울 테고 담요를 덮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렇게 당연한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놓으면 이상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지오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알았다.

그 목록을 지오는 이제 믿지 않기로 했다.

같은 날 15:40

낮에도 지오는 잠들지 못했다.

암막 커튼을 치고 누웠는데 천장에 자꾸 사진이 떠올라서, 결국 일어나 방바닥에 전부 늘어놓았다. 서랍에서 가져온 것까지 스물여섯 장이었고, 날짜순으로 두 줄로 깔아놓으니 방바닥이 거의 다 찼다.

지오는 왼쪽부터 짚어 나갔다.

첫날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정면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광대에 멍이 있었다. 둘째 날은 어머니가 누워 있고 지현이가 옆에 앉아서 얼굴이 반쯤 나왔다. 셋째 날은 둘 다 앉아 식판을 앞에 두고 있었고 어머니의 얼굴이 온전히 보였다. 넷째 날에 지현이가 손가락 넷을 폈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지오의 손가락이 사진 위를 하나씩 건너갔다.

열두 번째. 열세 번째.

열네 번째에서 손이 멈췄다.

열네 번째부터 어머니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열다섯 번째도, 열여섯 번째도, 스물여섯 번째까지도.

열세 장이었다. 열세 장 연속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없었다.

지오는 열세 번째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날은 어머니가 앉아서 무릎에 손을 얹고 있었고 옆얼굴이 나왔으며, 지현이가 무언가 말하는 중이라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그 옆얼굴이 지오가 가진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리고 열네 번째부터는 담요와 돌린 등과 뒤통수가 열세 번 반복됐다. 각도 하나 틀리지 않고.

지오는 방바닥에 앉은 채로 계산을 해보려고 했다.

사람이 열세 밤을 자는 동안 하루도 얼굴이 보이는 각도로 눕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그 확률을 구하는 법을 지오는 몰랐다. 다만 확률을 구할 줄 몰라도 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세상의 많은 진실이 그런 식으로 먼저 온다.

지오는 열네 번째를 들고 창가로 갔다. 커튼을 한 뼘 열고 그 틈의 빛에 사진을 비췄다.

담요 밖으로 머리카락이 조금 나와 있었다. 짧고 검었다. 어머니는 파마를 했고 뿌리부터 반쯤 세어 있어서 지오가 늘 염색약을 사다 날랐는데, 화질이 나빠서 머리카락만으로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깨선을 봤다. 어머니는 키가 작고 어깨가 좁아서 지오의 고등학교 교복 재킷이 헐렁하게 맞던 사람이었다. 사진 속 어깨는 담요에 덮여 폭을 재기 어려웠지만, 굳이 재보자면 재볼 수는 있었다.

지오는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를 나란히 놓고 두 어깨를 번갈아 봤다. 같다고 하기 어려웠다. 다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이 사진을 만든 사람의 솜씨였다.

17:10

지오는 열네 번째부터 스물여섯 번째까지, 열세 장에 찍힌 동생의 손가락을 다시 셌다.

날짜로 보면 그 구간 안에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나 봤어, 그리고 지금 오고 있는 것.

지오는 종이에 순서대로 적었다. 열네 번째 사진에서 어머니가 사라졌고, 그 며칠 뒤부터 지현이가 나 봤어를 보내기 시작했다. 앞뒤가 맞았다.

동생은 어머니가 없어진 것을 봤고, 그런데도 사진에는 어머니처럼 보이는 사람이 계속 앉아 있다는 것까지 봤고, 그 사실을 오빠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었다. 사흘에 세 글자씩 되는 속도로.

지오는 그 속도를 오래 생각했다. 열아홉 살짜리가 열세 밤 동안 담요를 뒤집어쓴 모르는 사람 옆에 앉아서, 매일 같은 시각에 오는 카메라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가락을 폈다. 손가락 하나를 잘못 펴면 처음부터 다시라는 것을 알면서.

23:00

그날 밤 지오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지하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량은 아직 나가지 않았고 대원들은 탈의실에 있어서, 형광등 소리만 천장 가득했다. 지오는 사무실로 들어가 노트북을 켜고 명단을 열었다.

검색창에 어머니 이름을 넣었다. 정미숙.

행 하나가 떴다. 사진, 이름, 생년, 최종 확인 위치, 이송 일시, 그리고 맨 끝에 상태 칸.

수용이었다.

지오는 그 두 글자를 봤다. 수용이면 아래에 있다는 뜻이고 아래에 있으면 매일 사진에 찍힌다는 뜻인데, 매일 찍히는 사람이 열세 번 연속으로 등을 돌릴 수는 없다. 화면과 사진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오는 상태 칸을 눌렀다. 목록이 아래로 떨어졌다. 대기와 수용이 먼저 있고, 그 밑으로 지오가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것들이 이어졌다.

건드릴 일 없다고 민현석이 말했던 것들이었다.

지오는 그 목록을 처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대기, 수용, 관찰, 반출, 폐기, 말소. 여섯 개가 위에서 아래로 나란히 있었고, 그 순서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읽는 데 삼 초면 알 수 있었다. 지오는 여섯 단어를 하나씩 눈으로 짚어 내려가면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반출, 에서 지오는 멈췄다.

수용이 여기 있다는 뜻이라면 반출은 여기 없다는 뜻이다. 어디론가 갔다는 뜻이고, 어디로 갔는지는 이 화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물건에나 쓰는 말을 사람 칸에 넣어두고도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는 회사에서, 지오는 3주 동안 야근을 했다.

지오는 어머니의 행으로 눈을 돌렸다. 수용이었다. 여전히 수용이었다.

23:20

그러다 지오는 자기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알았다.

이 화면은 지오가 갱신하는 화면이다. 지오가 클릭 두 번으로 대기를 수용으로 바꾸고, 지오가 바꾸지 않으면 아무도 바꾸지 않는다고, 지오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지오가 바꾸지 않아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치면 지오는 알 도리가 없다. 지오는 자기가 입력한 것만 기억하지 남이 다시 덮어쓴 것까지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오가 이 화면을 매일 본다는 것을 안다. 지오가 새벽 다섯 시마다 봉투를 받는다는 것도 안다.

애초에 사진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었나. 가족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고, 확인이 되어야 지오가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목적이 지오를 일하게 하는 데 있다면, 필요한 것은 확인뿐이다.

실제로 안전한지는 목적이 아니었다.

지오는 노트북을 닫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형광등이 웅웅거렸고 밖에서 차량 시동을 거는 소리가 났다. 오늘도 배차가 있고 오늘도 누군가 실려 올 것이며, 그 사람들의 이름을 엑셀에 옮겨 적는 일은 오늘도 지오가 할 것이었다.

지오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봤다. 떨리고 있었다. 첫 주 이후로 처음이었고, 이번에는 떨리는 것이 반가웠다.

다음 날, 05:00

민현석이 봉투를 놓고 갔다.

“오늘 좀 늦었네요.”

“…괜찮습니다.”

문이 닫히고 나서 지오는 봉투를 뜯었다.

사진 속에서 지현이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담요를 덮고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열네 번째였다.

지오는 동생의 손을 봤다. 오른손 다섯, 왼손은 접혀 있었다. 다섯이면 다섯 번째 자음이니 ㅁ이었다.

ㅁ ㅈ ㅁ.

지오는 서랍의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믿지 마.

세 글자가 완성되는 데 사흘이 걸렸고, 지오는 그 사흘 내내 답을 알고 있었으며, 알면서도 아니기를 바랐다. 바라는 데에 사흘을 다 썼다.

지오는 사진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진을 뒤집어봤다.

뒷면은 흰 종이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스물일곱 장을 받는 동안 한 번도 뒤집어본 적이 없었던 것은 볼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정말로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이 오늘은 다르게 읽혔다.

이 종이에는 앞면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면을 누가 만드는지 지오는 알지 못했다.

05:20

지오는 서랍을 열었다.

첫날의 종이컵이 있었고 사진이 스물일곱 장 있었으며, 서랍 안쪽 나무에는 볼펜 자국이 스물일곱 개 그어져 있었다. 그 옆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ㅇㅈㅁ

ㄴㅂㅇ

ㅁ

지오는 볼펜을 들어 마지막 줄을 마저 팠다.

ㅁㅈㅁ

세 문장이 나란히 놓였다. 오지 마. 나 봤어. 믿지 마.

지오는 아홉 글자를 위에서 아래로 읽고 아래에서 위로 다시 읽었다. 동생이 사흘에 세 글자씩, 스무 날 넘게 걸려서 보낸 전부가 아홉 글자였다.

그 스무 날 동안 지오가 위에서 한 일은 사진을 세고 명단을 정리하고 사람을 실어 오는 것이었다. 아래에 있는 쪽이 위에 있는 쪽보다 정확했다는 사실이, 이 아홉 글자에 다 들어 있었다.

지오는 서랍을 닫지 않고 종이컵을 꺼내 손에 쥐었다.

첫날 민현석이 물을 따라줬던 컵이었다. 마시지 않으려다가 결국 마셨던 컵이고, 버리지 않고 남겨둔 이유를 지오는 그날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정리했었다. 무엇을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지가 오늘에서야 분명해졌다.

지오는 컵을 구겼다. 한 번에 구겨지지 않아서 두 번 눌러야 했고, 다 구겨진 종이컵은 놀랄 만큼 작아져서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갔다.

05:40

지오는 사무실을 나왔다.

주차장은 비어 있었다. 차량 세 대가 앞머리를 출구 쪽으로 두고 서 있었고 바닥은 아직 젖어서 형광등을 되비쳤으며 락스 냄새가 얕게 깔려 있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여섯 명이 나와서 닦고 들어간 바닥이었다.

지오는 그 젖은 바닥을 가로질러 손잡이 없는 문 앞에서 멈췄다.

두 걸음 앞이었다.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던 그 자리이기도 했다. 그날 밤 두 걸음은 건널 수 없는 거리였고 지오는 결국 그 거리를 넘지 못했다.

천장에서는 환풍기가 낮게 돌고 있었다. 늘 그 소리였다. 저 위에 지오 하나를 위해 달린 기계들이 있고, 지오가 무엇을 하든 삼 분 십 초면 끝난다.

부르면 오지 않고, 나서기로 하면 온다. 그러나 나서는 것과 이기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지오는 이제 알았다. 나종배는 오십 년 동안 나서지 않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지오는 세 번 나섰는데 세 번 다 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질문 앞에서 지오는 오래 서 있었다.

지오는 뒷목에 손을 올려봤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아주 오래 문을 보다가, 지오는 돌아서서 사무실로 걸어갔다.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 들어가면 삼 분 십 초 만에 쓰러질 것이고, 쓰러지면 아무도 꺼내주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지오는 노트북을 다시 켰다. 이번에는 명단을 열지 않고 화면 오른쪽 위, 3주 동안 한 번도 눌러본 적 없는 메뉴로 커서를 옮겼다.

`기록`

거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지오는 몰랐다. 다만 누가 언제 무엇을 고쳤는지 남는 자리가 어딘가 있다면 그런 자리는 대개 이런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을, 3주 동안 남의 이름을 입력해본 사람은 알고 있었다.

지오는 그것을 눌렀다.

End of Episode
믿지 마
© 2026 ZZAN Studio. 무단 전재·복제·배포 금지
1
1
2
1 / 1